통섭 더 비기닝: 최재천 교수가 직접 말하는 『통섭』 출간 비하인드 스토리|『통섭』 출간 20주년 기념 심포지엄 기조 강연|최재천
한국진화학회는 대중의 높은 관심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미약했던 국내 진화학 연구의 저변을 확대하기 위해 설립되었습니다. 서점가나 언론에서는 진화학 관련 주제가 빈번히 다뤄지고, 팬데믹 시기를 지나며 바이러스의 진화에 대한 국민적 이해도 깊어졌지만, 정작 지식을 생산하는 전문 연구자의 수는 주변국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실정입니다. 이러한 학문적 불균형을 해소하고 진화학이 지닌 사회적 영향력에 걸맞은 연구 생태계를 조성하는 것이 우리 학회의 핵심적인 목표이자 사명입니다. 2022년 스반테 페보 교수의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 소식은 한국 진화학계의 현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였습니다. 세계적인 성과임에도 국내에서는 관련 해설 기사가 드물었고, 전문가 인터뷰마저 진화학과는 거리가 먼 분야의 연구자들에게 집중되는 양상을 보였습니다. 이는 연구자 층이 두텁지 못하고 대중과의 학문적 교류가 부족했던 탓입니다. 학회는 지난 3년간 젊은 연구자 양성에 힘쓰며, 생물학의 깊은 뿌리를 넘어 인간과 사회를 진화의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다양한 학문적 포용을 시도해 왔습니다. 지식 탐구자들은 각자의 전문 분야에 매몰되어 전체적인 그림을 놓치는 경향이 있습니다. 분과 학문의 벽은 견고해 보이지만, 정작 연구 대상이 되는 본질적인 원리는 인간이 만든 인위적인 구분선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과거의 '학제적 연구'가 단순한 병렬적 나열에 그쳤던 이유도 바로 이 지점에 있습니다. 서로 다른 분야의 사람들이 모여 앉는 것만으로는 진정한 소통이 일어나기 어려우며, 전체를 관통하는 통찰 없이는 부분적인 지식의 합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에드워드 윌슨 교수는 20세기 말, 분과 학문의 시대를 넘어 포괄적인 지식의 지도를 그리고자 '컨실리언스'라는 개념을 제안했습니다. 19세기 윌리엄 휴얼이 만든 후 사라졌던 이 단어를 발굴하여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것입니다. 한국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도 기존의 통합이나 융합이라는 단어가 가진 선입견을 피하기 위해 고심 끝에 '통섭'이라는 생소한 용어를 선택했습니다. 이는 새로운 개념을 명확하게 정의하고 학문적 논의의 장을 새롭게 마련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습니다. '거느릴 통(統)'과 '다스릴 섭(攝)'을 조합하여 만든 '통섭'은 처음 소개되었을 때 철학계를 중심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이 용어가 원효대사도 사용했던 깊은 역사적 뿌리를 가진 단어라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습니다. 저자는 서구의 환원주의적 접근이 강조된 원서의 내용에 불편함을 느끼면서도,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진정으로 평등하게 만나는 지점을 찾고자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서문과 본문의 관점 차이로 인해 번역에 대한 오해가 발생하기도 했지만, 이는 오히려 학문적 담론을 풍성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지식의 결합 방식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통합이 상향식의 물리적 합침이라면, 융합은 두 성질이 섞이는 화학적 합침에 해당합니다. 반면 통섭은 서로 다른 학문이 자주 만나 교류하며 서로를 알아가는 생물학적 합침을 지향합니다. 인문학적 가치와 자연과학의 통칙이 조화를 이루는 과정은 단순한 이론의 통합을 넘어, 인간과 세상을 이해하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합니다. 이러한 생물학적 만남은 학문의 제국주의적 접근을 경계하고 상호 존중의 기반을 마련합니다. 오랜 학문적 여정을 거쳐 내린 결론은 통섭의 의미가 '다스림'보다는 '소통'에 더 가까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학자가 평생 견지해온 생각을 바꾸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지만, 학문의 깊이가 더해짐에 따라 기존의 틀을 깨고 나가는 과정은 필수적입니다. 이제 '거느릴 통(統)' 대신 '통할 통(通)'을 사용하여, 학문 간의 진정한 대화와 연결을 추구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변화는 진화학이 통섭의 성격을 띤 근본적인 학문로서 우리 사회의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하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