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요약
우리에게 비닐봉지는 물건을 담아 옮기는 매우 일상적인 도구입니다. 하지만 아프리카 케냐의 나이로비와 같은 대도시에서는 우리가 상상하기 힘든 전혀 다른 용도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바로 '날아다니는 화장실'이라는 생경한 별명으로 불리는 용도입니다. 화장실 인프라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환경에서 사람들은 비닐봉지에 배설물을 담아 집에서 최대한 먼 곳으로 던지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합니다. 이는 과학기술의 산물이 지역적 상황에 따라 얼마나 다르게 쓰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단편적인 사례입니다.
어제까지 이웃이었던 사람들이 인종이나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를 살해하는 집단 학살의 비극적인 현장에도 비닐봉지는 있었습니다.
비닐봉지의 또 다른 이면은 인류의 비극적인 역사와 맞닿아 있습니다. 20세기 후반 세계 곳곳에서 벌어진 집단 학살 현장에서는 뜻밖에도 첨단 무기가 아닌 일상의 도구들이 살상 수단으로 동원되었습니다. 몽둥이나 죽창, 낫과 같은 전근대적인 도구들 사이에서 저렴한 화학 발명품인 비닐봉지가 살인 도구로 빈번하게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충격적입니다. 이처럼 가장 평범한 사물이 때로는 잔인한 도구로 돌변할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기술의 용도에 대한 깊은 시사점을 던져줍니다.
보통 과학기술을 접할 때 우리는 누가 처음 발견했는지, 혹은 어떤 기업이 무슨 목적으로 만들었는지와 같은 생산자 중심의 질문에 집중하곤 합니다. 하지만 기술의 사회적 영향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누가, 어떤 맥락에서 이를 실제로 소비하고 사용하는지를 살피는 것이 더 중요할 수 있습니다. 개발자가 의도한 목적과는 무관하게 기술은 사용자의 환경과 필요에 따라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재정의됩니다. 따라서 기술 그 자체보다 그것이 놓인 맥락을 이해하는 것이 과학기술을 바라보는 올바른 시각입니다.
나이로비에서 비닐봉지가 화장실 대신 사용되는 배경에는 급격한 도시 팽창과 인프라의 부재라는 사회적 문제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도시로 몰려드는 인구에 비해 상수도와 하수도 시설이 턱없이 부족하다 보니, 무허가 주택에 거주하는 빈민들은 위생적인 생리 현상 해결을 위해 비닐봉지라는 차선책을 선택하게 된 것입니다. 개발 당시에는 결코 예상하지 못했던 이러한 사용 방식은 과학기술이 사회적 불평등과 만났을 때 어떤 기묘한 형태로 변용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학기술의 사물이 어떤 사람들에 의해 어떤 목적으로 쓰일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때, 예기치 못한 부작용이나 비극이 발생하곤 합니다. 비닐봉지를 개발한 이들은 이것이 화장실 대용이 되거나 누군가를 해치는 도구가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과학기술에 대해 가져야 할 태도는 단순히 새로운 발명을 환영하는 것에 그쳐선 안 됩니다. 기술이 사회 속에서 작동하며 만들어낼 다양한 시나리오를 집요하게 질문하고 고민하는 것만이 과학의 비극을 막고 진정한 가치를 찾는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