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요약
일상에서 마주하는 수많은 빨강 중에서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음양오행 사상을 바탕으로 한 오방색을 사용해 왔습니다. 청색, 적색, 황색, 백색, 흑색의 다섯 가지 색상은 각각 동서남북과 중앙이라는 방위를 상징하며 단순한 색 이상의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주관적인 색의 해석을 넘어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기준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오늘날의 색채계는 사람의 시각 시스템에 근거한 정밀한 측정 기술을 통해 더욱 세분화되고 체계적인 표준을 정립하게 되었습니다.
현재 세계적으로 널리 쓰이는 표준은 국제조명위원회(CIE)의 CIE 색 좌표입니다. 이는 인간이 볼 수 있는 모든 가시광선 영역의 색을 수치화하여 표현한 기준계입니다. 물체나 광원에서 반사된 스펙트럼을 정밀하게 측정하여 시각 시스템의 반응에 따라 CIE 색 좌표를 계산하는 방식입니다. 이 시스템에서 흰색은 다이어그램의 중앙에 위치하며, 색이 순수해질수록 가장자리로 이동하게 됩니다. 1931년에 정의된 이 표준은 지금까지도 측색과 측광 분야에서 가장 신뢰받는 지표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CIE 외에도 우리가 흔히 접하는 색채 체계로는 먼셀 색채계와 RGB 색채계가 있습니다. 먼셀 색채계는 색상, 명도, 채도라는 세 가지 속성을 축으로 하여 색 공간을 구성하며, 직관적인 표시 방법 덕분에 교육용으로도 널리 활용됩니다. 반면 RGB 색채계는 디스플레이 기술의 발전과 함께 등장한 방식으로, 빛의 삼원색인 빨강, 초록, 파랑을 조합하는 가산 혼합 원리를 이용합니다. 이처럼 용도에 따라 다양한 색채 표준이 존재하지만, 국가의 상징인 국기를 제작할 때는 가장 정밀하고 변하지 않는 기준이 필요합니다.
과거에는 태극기마다 적색과 청색의 농도가 제각각이어서 국가적 정체성을 일관되게 표현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특히 국기 게양이 필요한 국제회의 시 외국 기관에서 우리나라 국기의 정확한 CIE 색 좌표를 문의해올 때 명확한 답변을 주기 어려웠던 실질적인 문제도 발생했습니다. '하늘 아래 같은 색은 없다'는 말처럼 빨간색으로 분류되는 색상만 수십 가지에 달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혼란을 막고 세계 어디서나 동일한 태극기를 게양하기 위해, 색채의 정확한 측정과 재현을 바탕으로 한 표준화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동일한 색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색채의 정확한 측정과 재현이 필수 조건입니다.
이 난제를 해결한 주인공은 한국표준과학연구원(KRISS)입니다. 연구원은 축적된 측정 표준 기술을 활용해 태극기의 표준 색도를 선정하고 관리하는 기준을 확립했습니다. CIE 색 좌표를 기준으로 제정된 이 표준 덕분에 이제는 전 세계 어디서든 일관된 태극기를 제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현재는 태극기뿐만 아니라 도로명판이나 안전 표지와 같은 공공디자인 전반에 이 표준이 적용되고 있습니다. 정밀한 표준이 깃든 태극기를 보며 우리 일상 속에 숨어 있는 과학의 가치를 다시금 되새겨 봅니다.